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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군산에 학교 세워… 아들 셋 조선 땅에 묻고도 "나는 행복합니다"

어떤 삶을 살아가고 계신가요? 자신의 삶에 만족하며 행복하게 살아가고 계신가요? 아니면 어려움과 고난 속에서 힘겨워하고 계신가요? 오늘 소개할 이야기는 바로 이런 질문에 대한 답을 제시해줄 것입니다.

 

그의 이야기를 들어보세요

 

 

19세기 후반, 조선에 도착한 한 미국 선교사의 삶은 우리에게 많은 교훈을 줍니다. 그는 조선 땅에서 세 아들을 잃었지만, 여전히 행복하다고 말했습니다. 그의 삶을 통해 우리는 진정한 행복이란 무엇인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배울 수 있을 것입니다.

 

선교사 윌리엄 전킨의 삶

윌리엄 전킨은 1859년 미국 버지니아주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1885년 4월 5일 조선에 도착해 1893년 전주, 1896년 4월부터는 군산을 중심으로 활동했습니다. 그는 조선 사람들과 함께 생활하며 학교를 세우고 의료 봉사를 하는 등 선교 활동에 전념했습니다.

 

아들 셋을 잃은 슬픔

하지만 전킨 선교사의 삶에는 큰 슬픔도 있었습니다. 그는 세 아들을 모두 조선의 풍토병으로 잃어야 했습니다. 이런 비극적인 상황에서도 전킨 선교사는 포기하지 않고 계속해서 조선 사람들을 위해 헌신했습니다.

 

아들들의 죽음

전킨 선교사는 1892년 조선에 도착한 후 1893년, 1895년, 1899년에 세 아들을 잇달아 잃었습니다. 당시 조선에는 콜레라, 천연두 등 각종 전염병이 만연했고, 의료 환경도 열악했기 때문에 어린 아이들이 쉽게 목숨을 잃었습니다. 전킨 선교사는 이런 상황 속에서 아들들을 하나씩 잃어야 했습니다.

 

학교 설립과 의료 봉사

이런 비극적인 상황 속에서도 전킨 선교사는 포기하지 않고 계속해서 조선 사람들을 위해 헌신했습니다. 그는 1903년 남학생들을 위한 영명학교(현 군산제일고)와 1904년 군산 여학교를 세웠습니다. 또한 콜레라 등 전염병이 돌면 몸을 던져 환자를 돌보았고, 거리에 넘쳐나는 고아들을 거두어 먹이고 길렀습니다.

 

건강 악화와 전주 이주

하지만 전킨 선교사 자신도 원래부터 병약한 체질이었습니다. 남장로교 선교본부는 그의 건강이 염려되어 군산을 떠나 전주 시내 반경 6마일 안에서만 사역하도록 명령했습니다. 이에 전킨 선교사는 전주에서 활동하며 조선 사람들을 위해 헌신했습니다.

 

행복한 삶과 죽음

전킨 선교사는 세 아들을 모두 잃었지만, 여전히 행복하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1903년 전주에서 눈을 감을 때 "이것이 죽음이라면 참 좋군요. 저는 갑니다. 저는 정말 행복합니다."라는 유언을 남겼습니다.

 

행복의 비밀

전킨 선교사가 이렇게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그가 조선 사람들을 진심으로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자신의 삶을 조선 사람들을 위해 바쳤고, 그들과 함께 기쁨과 슬픔을 나누며 살아갔습니다. 이런 삶의 태도가 그를 행복하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선교 활동의 유산

전킨 선교사의 헌신적인 삶은 조선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는 서울을 중심으로 연희전문학교와 배재학당 등 많은 학교를 세웠고, 의료 봉사를 통해 조선 사람들의 삶을 개선하는 데 기여했습니다. 이러한 그의 업적은 오늘날까지 이어져 한국 교육과 의료 발전에 큰 토대가 되고 있습니다.

 

배운 점과 활용 방안

전킨 선교사의 삶을 통해 우리는 무엇을 배울 수 있을까요? 그의 행복한 삶의 비결은 무엇이었을까요? 또한 우리는 그의 삶으로부터 어떤 교훈을 얻을 수 있을까요?

 

자주 묻는 질문

윌리엄 전킨 선교사는 어떤 분이었나요?

윌리엄 전킨 선교사는 19세기 미국 북장로교 선교사로, 1885년 조선에 도착해 전주와 군산을 중심으로 선교 활동을 펼쳤습니다. 그는 세 아들을 모두 조선 땅에 묻었지만, 여전히 조선 사람들을 사랑하며 자신의 생을 바쳤습니다. 전킨 선교사는 전주와 군산에 학교를 세워 선진 지식을 전파했고, 콜레라 등 전염병 환자를 돌보는 등 헌신적인 모습을 보였습니다. 그의 마지막 유언은 "이것이 죽음이라면 참 좋군요. 저는 갑니다. 저는 정말 행복합니다."였습니다.

 

전킨 선교사는 어떤 학교를 세웠나요?

전킨 선교사는 1903년 남학생들을 위한 영명학교(현 군산제일고)와 1904년 군산 여학교를 세웠습니다. 이를 통해 조선 사람들에게 서구의 선진 지식을 전파하고자 했습니다. 또한 그는 콜레라 등 전염병이 돌 때마다 몸을 던져 환자를 돌보는 등 헌신적인 모습을 보였습니다.

 

전킨 선교사는 어떤 어려움을 겪었나요?

전킨 선교사는 조선에서 세 아들을 모두 풍토병으로 잃어야 했습니다. 이러한 참척의 통한을 가슴에 품고도 그는 포기하지 않고 계속해서 조선 사람들을 사랑하며 헌신했습니다. 또한 그 자신도 병약한 체질이었기 때문에 남장로교 선교본부에서는 그의 건강을 걱정해 군산을 떠나 전주 시내 반경 6마일 안에서만 사역하도록 명령했습니다.

 

전킨 선교사의 마지막 유언은 무엇이었나요?

전킨 선교사는 전주에서 눈을 감을 때 "이것이 죽음이라면 참 좋군요. 저는 갑니다. 저는 정말 행복합니다."라는 유언을 남겼습니다. 이처럼 그는 조선 땅에서의 삶과 죽음 모두를 행복하게 받아들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전킨 선교사의 선교 활동은 어떤 영향을 미쳤나요?

전킨 선교사의 선교 활동은 당시 미국의 많은 젊은 기독교인들의 가슴을 뒤흔들었습니다. 그의 헌신적인 모습과 조선에 대한 사랑은 많은 이들에게 감동을 주었고, 이후 레이놀즈, 캐머런 존슨, 루이스 테이트 등 다른 선교사들이 조선으로 향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또한 전킨 선교사가 세운 영명학교와 군산 여학교는 조선 사람들에게 서구의 선진 지식을 전파하는 데 기여했습니다.